커뮤니케이션에 관한 기본 원칙

Written by JoonPapa on . Posted in 조직, 지식, 지식 & 경영, 커뮤니케이션

출처 : “경영의 지배”(피터 드러커 지음) 의 18장 “정보에서 커뮤니케이션으로” 중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네 가지 기본 원칙

  1. 커뮤니케이션은 지각(perception)이다.
  2. 케뮤니케이션은 기대(expectations)이다.
  3. 커뮤니케이션은 적극적 참여(involvement)를 유도한다. (드러커는 이 글을 1973년 출간된 저작 “경영:과제, 책임, 실무”의 제38장 “경영 커뮤니케이션”에 재정리하여 수록했는데, 그때 이부분을 요구(demand)로 수정했다)
  4. 커뮤니케이션과 정보는 전적으로 상이한 것이지만, 정보는 기능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전제로 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지각’이다.
  • ‘커뮤니케이션 행위를 하는 사람’이라는 말에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른바 커뮤니케이터(communicator), 즉 무언가를 전달하는 사람이 커뮤니케이션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무언가를 외친다고 하자. 하지만 그것을 듣는 사람이 없다면, 커뮤니케이션은 없는 것이다. 단지 의미없는 소리만이 있을 뿐이다. 오직 그는 듣는 사람이 – 혹은 지각자(percipient)라는 말이 더 나을 것이다 – 지각할 수 있게 하거나 지각할 수 없게 할 뿐이다. 
  • 지각은 논리가 아니라 경험이다. 우선 그것은 사람은 항상 형태를 지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낱낱의 점들만을 지각할 수가 없다. 그것들은 언제나 전체 그림의 한 부분이다. 홀(Edward T. Hall)이 사용했던 ‘조용한 언어(silent language)’, 즉 문화적/사회적 준거틀은 말할 것도 없고 몸짓, 목소리, 환경 등은 입으로 하는 말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 우리가 지가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 하나는, 사람은 자신이 지각할 능력이 있는 것만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귀가 일정한 주파수 이상은 듣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애당초 그 지각 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지각하지 못한다. 자극 자체는 커뮤니케이션이 될 수 없다.
플라톤의 “파이드루스(Phaedrus)”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고 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말을 할 때 듣는 사람의 경험에 맞추어 말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목수와 이야기할 때는 목수가 사용하는 말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은 발신자가 수신자의 언어 혹은 수신자가 사용하는 용어로 말할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 여기에서 그 용어들은 수신자의 경험에 기초한 것이어야만 한다.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용어를 설명하려는 노력은 별 효용이 없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 용어에 대해서는 수용할 능력이 없다. 자신의 경험을 벗어난 새로운 용어는 그들의 지각 능력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 매체가 무엇인건 간에,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제일 먼저 질문해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이 커뮤니케이션이 수신자의 지각 능력 범위 안에 있는가? 그가 이것을 수용할 수 있는가?
장님과 코끼리에 관한 옛날이야기에서, 코끼리의 피부만을 만진 장님이 다리만 만진 장님에게 이야기를 듣고 직접 다리를 만져보기 전까지지는, 이들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될 가능성이 없다. 달리 말해, 수신자 즉, 진정한 커뮤니케이터가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지, 그리고 왜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기 전에는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없다.
커뮤니케이션은 ‘기대’이다.
우리는 우리가 지각하고 싶어 하는 것만을 지각한다. 대체로 보고자 하는 것을 보며, 듣고자 하는 것을 듣는다.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나면 적개심을 가지게 될 지 모르지만 그 점은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사실은, 자신이 기대하지 않았던 것은 대체로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기대하지 않았던 것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으며 오직 무시당호고 만다. 혹은 그것은 잘못 이해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기대했던 것이 일어난 것처럼 잘못 보거나 잘못 듣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기 전에, 수신자가 무엇을 보기를 원하고 무엇을 듣고 싶어 하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이 그의 기대를 이용할 수 있는지 여부 -그리고 그 기대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소외의 충격’, 즉 수신자의 기대를 깨뜨리고 그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일어난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강요하는 ‘각성’이 필요한지를 알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적극적 참여(involvement)를 유도한다
커뮤니케이션은 언제나 선전 행위이다. 선전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뭔가를 알리고자’ 한다. 지금 우리가 알다시피, 선전은 ‘개방적 토론’을 신뢰하는 합리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강력하고, 반대로 선전의 신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 예컨대, 나치스 치하의 선전장과 괴벨스 박사가 – 믿었고 또 사람들이 믿어 주기를 바라는 것보다는 훨씬 덜 강력하다.
총력 선전의 위험은 사람들이 그것을 믿게 될 것이라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위험한 것은 사람들이 아무 것도 믿지 않게 되고, 모든 커뮤니케이션이 의심의 대상으로 전락한다는 점이다. 결국 , 어떤 커뮤니케이션도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게 된다. 어떤 사람이 말하는 그 어느 것도 강요로 간주되고, 거부되며, 저항을 받게 되고, 마침내 실질적으로 전혀 들리지 않게 된다.
촐력 선전의 최종 결과는 광신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냉소주의자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층 더 크고 위험한 부패를 초래할 지도 모른다.
커뮤니케이션은 언제나 수신자가 중용한 인물이 되기를, 어떤 것을 하기를, 그리고 어떤 것을 믿기를 요구한다. 바꾸어 말해, 만일 어떤 커뮤니케이션이 수신자의 야망, 가치관, 또는 목적에 부합하면, 그것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만일 커뮤니케이션이 수신자의 야망, 가치관, 또는 동기와 어긋나면, 그것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잘해야 저항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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