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Written by DSPman on . Posted in 그 외 관심사

부제: 세계를 바꾼 과일의 운명

머리말_ 바나나에 대해 알게 된 놀라운 사실들

나이 마흔 쯤 된 나 같은 보통 미국인이라면 지금껏 약 1만 개의 바나나를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과일에 대해 그리 많이 생각해보지느 않았으리라. 나만 해도 얼마 전까지는 그랬으니까. 바나나는 누군가 자신을 사 가서 맛있게 먹어주기만을 기라디며 늘 곁에 있어왔다. 아기 때 맨 처음 먹은 과일도 바나나였고, 늙어서 마지막으로 맛볼 과일도 바나나일 것이다. 우리 대다수에게 바나나는 그저 바나나일 뿐이다. 노랗고 달콤한, 비슷비슷한 크기의 씨 없는 과일.

내가 바나나에 대해서 처음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2003년 ‘뉴사이언티스트’에 실린 짤막한 기사를 읽고 나서였다. 나는 그 기사에 매료되었는데, 바나나가 세계에서 가장 인기 높고 많이 팔리며 꼭 필요한 과일이라는 내용이었다. 미국인이 한 해 먹는 바나나의 양이 사과와 오렌지를 합친 것보다 많다고 한다. 그리고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바나나가 (쌀이나 감자보다 많은) 수억 명의 인구를 먹여 살린다고 한다. 기사는 전 세계 바나나에 번지고 잇는 질병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아직 치료법이 알려지지 않은 마름병이라고 했다.

주류 언론이 이 병에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란 나는 전에 종종 기사를 썼던 ‘파퓰러사이언스’에 바나나 관련 글을 쓰겠다고 제안했다. ‘뉴사이언티스트’기사가 중단했던 부분, 곧 바나나 마름병으로 인해 농업에 닥친 위기를 보여주고, 그런 상황이 발생한 경위를 설명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취재차 방문한 온두라스의 바나나 농장(plantation)†에 머문 기간은 일주일이었지만, 그곳에서 알게 된 사실은 엄청나게 많았다. 병 때문에 쪼그라든 바나나 나무는 어디 있지? 암울하고 폐허가 되었다는 농장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미국인이 먹는 바나나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그곳이나 중남미 전역의 농장에 늘어선 바나나 나무는 멀쩡해 보였다.

바나나에 대해서 더 알아보아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이런 외관상의 모순 때문이었다. 조사를 거듭할수록 세계인이 먹는 바나나야말로 과일 중에서 가장 모순적인 과일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도시락 가방에 아무렇게나 넣어 들고 다니는 바나나야말로 인간이 재배한 것 중 가장 골치 아픈 농작물이다. 먼 옛날 최초의 농부가 터를 잡고 공동체를 이룬 것은 이 과일 덕분이었다. 현대에 바나나는 말 그래도 나라를 멸망시키고 인명을 앗아가곤 했다.

내가 찾은 온두라스의 농장은 바로 그러한 역사와 모순의 산물이다. 하지만 이 농장을 비롯해 전 세계 유사한 지역에서 자라는 바나나는 현재 위협받고 있다. 내가 온두라스에서 볼 수 없었던 질병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병의 전염 상황은 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 몇십 년 뒤에는 많은이가 사랑하고 의지하는 이 과일이 완전히 자취를 감출 수도 있다.

바나나에 대해 알게 된 거의 모든 사실이 놀라웠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바나나는 알고 보면 지구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생물이다. 바나나 나무는 결코 나무가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커다른 풀이다. 그 열매는 사실 거대한 장과(漿果, berry)다. 가장 많이 먹는 바나나는 캐번디시라는 품종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1000종이 넘는 바나나가 잇으며, 이 중에는 새끼손가락만 한 크기에 씹으면 이가 부러질 정도로 단단한 씨가 가득 든 야생종도 수십 가지나 된다. 아시아에서 아프리카를 거쳐 드디어 오늘 날 미국인들의 아침 식탁에 오르기까지 바나나의 여정에는 알려진 것과 미지의 것이 뒤섞여 있다. 몇 안되는 정글 종에서 독특한 번식체계를 갖춘 복잡한 경작물로 수천 년에 걸쳐 진화한 과정 역시 마찬가지다(오늘날 우리가 먹는 바나나는 스스로 번식을 할 수 없고, 반드시 인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바나나는 인간이 최초로 경작한 식물 중의 하나이며 (적어도 7000년 전에 처음 재배되었다), 지금도 가장 중요한 과일로 남아 있다. 바나나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기르는 광리이며, 전체 작물 중에서도 밀, 쌀 , 옥수수 다음인 네번째로 생산량이 많다.

바나나의 과거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로 가득하다. 19세기 말 몇몇 악덕 사업가들이 이제까지 대다수 미국인들에게 생소했던 이 과일의 시장을 개척했다. 바나나는 이내 어마어마한 돈벌이가 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20년도 되지 않아 바나나의 판매량은 미국에서 최고였던 사과를 추월했다. 사과 산지는 미국의 거의 모든 도시와 몇 시간 거리에 있었던 반면, 바나나는 운송 거리가 수천 킬로미터에 달했고 썩기 쉬운 열대과일이었는데도 말이다. 초기 바나나 사업가들이 설립한, 지금의 ‘치키타(Chiquita)’와 ‘돌(Dole)’ 사의 전신인 회사들은 울창한 밀림에서 바나나를 싣고 와 지방 시장에 이르는 기나긴 유통과정 도안 바나나의 숙성을 조절하고 지연시키는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그들은 열대우림을 밀어버리고, 철도를 놓고, 도시들을 건설했다. 그리고 항구에 들어오는 화물선과 농장의 교신이 가능하게끔 라디오 통신망을 비롯한 기술 전반을 개발했다(당시의 기술 중 일부는 지금도 활용되고 있다). 바나나 화물선은 최초로 냉장설비를 갖춘 선박이었으며, 바나나 회사들은 처음으로 숙성 지연을 위해 CA 저장법(공기 중 이산화탄소와 산소의 비중을 조절해 과실의 신선도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보관법-옮긴이)을 이용했다. 오늘날 널리 이용되는 이 혁신적인 기술은 바나나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과일산업’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사과, 오렌지, 체리, 포도를 공급하는 소규모 농장과 지방 도매상이 전부였다.

바나나는 어디에나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을 받아들인 문화를 바꿔옸다. 가장 오래된 성경 번역에 따르면, 에덴동산에서 이브가 먹었다는 ‘사과’는 사실은 더 성적인 것을 연상시키는 바나나였다. 빅토리아 호수 인근 아프리카 나라들 음식에서 ‘음식’을 가리키는 스와힐리어 단어에는 또한 ‘바나나’라는 뜻도 있다. 중앙아메리카에서 바나나는 나라들의 흥망성쇠를 좌지우지했다. 1950년대, 과테말라 최초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는 바나나에 대한 통제권을 놓고 바나나 회사들과 싸우다가 전복되었다. 이로 인해 1980년대 마야인 집단학살이 일어나기도 했다. 1960년대에 바나나 기업들은 피델 카스트로가 국유화한 농장을 다시 차지하기 위해, CIA에 화물선을 내어주어 피그스 만 침공에 힘을 보태었다. 바나나는 끓임없이 승리와 비극에 연루되었다. 온두라스 바나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다룬 소설, 시, 노래를 썼다. 치키타의 사장 엘리 블랙은 정치계와 얽힌 기업 비리가 폭로되자, 1974년 맨해튼 고층 빌딩의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바나나 공화국’이라는 말은 20세기 내내 권력을 휘두르던 바나나 생산자들의 과도한 영향력을 반영한다.

현재 죽어가고 있는 바나나, 캐번디시는 세상에서 가장 인기 좋은 단일 과일종이다. 독자 여러분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모두가 먹는 바나나가 캐번디시 종이다. 그런데 ‘파퓰러사이언스’에 기사를 쓰기 위해 조사하던 중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조부모들이 즐기던 바나나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먹던 바나나는 ‘거구의 마이크(Big Mike)’라는 뜻의 ‘그로 미셸(Gros Michel)’ 종이었다. 그로 미셸은 모든 점에서 캐번디시보다 우우러했다. 크기도 더 크고 껍질도 더 두꺼운데다 질감도 한층 부드러웠으며 맛도 더 진하고 풍부했다. 미국인이 처음 먹은 바나나가 바로 이 그러 미셸이었으며, 19세기 무렵부터 제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미국인이 사고, 먹고, 아는 유일한 바나나였다.

그러나 그로 미셸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중앙아메리카에서 처음 바나나를 경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병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병이 처음 발견된 곳이 파나마였으므로 ‘파나마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파나마병, 정확히 말하면 이 곰팡이는 매우 치명적이었다. 매개체는 흙과 물이었다. 일단 농장에 발을 디디면 삽시간에 황폐화시킨 다음 다른 농장으로 옮겨갔다.

파나마병이 그토록 치명적인 이유는 병균이 강해서만은 아니었다. 바나나 알맹이가 약한 것도 한몫했다. 이는 바나나의 또 다른 모순인데, 우리가 그 겉모습을 보고 직관적으로 내리는 결론과는 상반되기 때문이다. 바나나의 두꺼운 껍질은 아주 단단해서 과일가게까지 가는 동안 상자 안에 꽉꽉 채워도, 에콰도르에서 노새 등에 아무렇게나 집어던져도, 습하고 울창한 필리핀 농장에서 스쿠터에 다발째 묶어 덜컹거리면서 운반해도 될 정도다. 복숭아나 자두와 달리, 바나나의 숙성 속도는 거의 일정하다. 초록색인 채로 가게에 도착한 바나나는 점차 노랗게 익다가 정확히 7일뒤면 갈색 반점이 생긴다. 바나나만큼 한결같고 신뢰할 수 있는 과일도 드물다. 그렇기에 다들 그렇게 엄청나게 먹어대는 것이다. 바나나의 맛과 외관은 맥도날드의 빅맥처럼 예측 가능하다.

그 이유는 간단한데, 바나나 껍질을 벗겨본면 금방 알 수 있다. 바나나에는 씨가 없다. 슈퍼마켓에서 파는 바나나를 이 잡듯 뒤진들 씨는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바나나는 복제로 재배하기 때문이다. 바나나는 장미 꺾꽂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또 다른 바나나를 만든다. 그렇게 해서 똑같은 바나나를 10억개도 만들 수 있다. 우리가 먹는 바나나는 유전적으로 전부 쌍둥이인 셈이다. 미국인이 먹는 대부분의 바나나를 재배하는 에콰도르든, 유럽 시장에 바나나를 공급하는 카나리아 제도든, 아니면 호주, 대만, 말레이시아든 바나나는 똑같다. 스위스 무슬리(시리얼의 일종으로 압착 귀리, 견과류, 말린 광리이 함유된 무슬리의 대표적 브랜드-옮긴이)에 들어있는 말린 바나나나 라이스 크리스피(켈로그 사에서 판매하는 쌀로 만든 시리얼-옮긴이)에 우리가 썰어 넣는 바나나나 매한가지다. <소림축구>(2001)에서 홍콩 영화배우 주성치가 밟고 미끄러진 바나나는 <순례자>(1923)에서 찰리 채플린을 엉덩방아 찧게 만든 그로미셸과 형제라 할 정도로 같은 집단에 속한다.

전부 똑같다는 말은 전부 병에 걸리기도 쉽다는 말이다. 수십억 개의 바나나가 똑같다는 말은 그중 하나만 병에 걸려도 전부 병에 걸릴 수 있다는 예기다.

그로 미셸의 운명이 바로 그러했다. 파나마병은 처음 발견된 곳에서 인접 국가로 퍼졌다. 북쪽으로는 코스타리카를 거쳐 과테말라까지, 남쪽으로는 콜롬비아와 에콰도르까지 퍼져나갔다. 이렇게 진행되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 처음 병이 발견되고 50년이 지난 1960년, 그로 미셸은 사실상 멸종됐다. 위기에 처한 바나나 업계는 완전히 사라질 판국이었지만, 그들은 망하기 직전에 새로운 바나나를 도입했다.

캐번디시는 파나마병에 면역이 있었다. 몇 년 후, 폐허가 됐던 농장은 다시 전처럼 경작을 시작했다. 새로운 종으로의 전환은 소비자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매우 신속하고 매끄러웠다. 하지만 그로 미셸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은 새로운 바나나의 등장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은 가고 없는 그 옛날의 바나나는 매우 약했지만, 키우기 적당하고 맛도 좋은 캐번디시는 강하다는 가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캐번디시가 파나마병에 튼튼했던 것은 강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적당한 시간과 장소에 우연히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전 세계 많은 나라들이(아시아, 아프리카, 인도, 남패평양 제도들에서 호주와 뉴질랜드에 이르기까지) 캐번디시 외의 다른 바나나 품종들을 길러 먹는데, 이들 역시 파나마병에 감염되기 쉬웠다. 파나마병이 한번 퍼지면 예외 없이 전멸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은 지역 바나나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파키스탄 전역이나 우간다의 작은 마을에서는 주식이지만, 경작지가 제한되어 있기에 병이 발생해도 피해는 그 지역에 그친다. 이것은 그로 미셸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피해 지역은 지구의 절반에 달할 정도로 거대했다. 상업용 바나나와 집 주위에서 키워 먹는 바나나가 섞일 일은 없었기에, 파나마병은 대서양이나 패평양을 건너지 못했다. 그러나 캐번디시는 전과 달리 급변하는 세계에 도입되었다. 처음에 캐번디시는 그로 미셸과 같은 지역에서만 경작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바나나에 대한 세계인의 식욕이 변하기 시작했다. 세계 곳곳에서 인구가 도시로 몰려들고 사람들이 바나나를 원하자, 먼 거리에도 손상없이 익기 직전에 운반되어 식료품점 진열대에 놓여 한결같은 맛을 낼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말레이시아가 바로 그런 곳이었다. 말레이시아에 캐번디시 농장이 처음 들어선 것은 1980년대였다. 경작지의 규모는 빠르게 커졌다. 수천 헥타르에 달하는 열대우림, 야자유 농장이 있던 땅이 바나나 농장으로 탈바꿈했다. 아시아 지역에서 상업용으로 과일을 키운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땅을 갈아엎고 바나나를 심은 지 몇 년 뒤, 나무가 죽기 시작했다. 뿌리로 스며든 정체불명의 병균 때문에 잎의 색깔이 변하고 수분공급이 막혔다.

과학자들은 몇 년이 걸린 끝에 병의 정체를 알아냈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천하무적이라고 여겼던 캐번디시를 습격한 것은 다름 아닌 파나마병이었다. 이유를 밝히는 데 다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캐번디시가 파나마병에 면역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로 미셸을 파괴한 파나마병의 특정 종류에만 면역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파나마병의 그 변종은 오직 서반구에서만 발견되었다. 말레이시아의 토양에 도사리고 있던 병균은 다른 종류였다. 그 병은 캐번디시에게 치명적일 뿐 아니라, 바나나 나무를 완전히 죽이면서 초기의 파나마병보다 더 빠르게 확산되어 더 큰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이 책을 출간하기 전 마지막으로 떠났던 현지 조사에서 그 광경을 목도할 수 있었다. 2007년 초, 후빈 첸이라는 중국인 과학자가 광둥 남부의 농장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곳에서 나느 성장을 멈추고 썩어가는 바나나가 줄줄이 늘어선 광경을 보았다(온두라스 농장을 찾았을 때 기대했던 질병의 피해를 슬프게도 이곳에서 보게 된 것이다). 그해 중반 바나나 마름병은 중국에서 큰 뉴스가 되었고, 어느 신문기사는 이 병을 ‘바나나암’이라고 묘사했다. 불과 며칠 만에 상당수의 소비자와 농부는 행여 병에 걸릴까 두려워하며 바나나를 외면했다. 한 달도 안 돼 중국 내 바나나 판매량은 급감했다. 소문은 와전되어 바나나가 에이즈를 일으킨다고까지 이야기되었다. 정부 관료들은 바나나를 먹어도 안전하다고 필사적으로 호소했다. 지당한 말이다. 바나나를 먹는다고 사람이 병에 걸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작물 자체는 현재 안전하지 못하다. 풀 죽은 첸은 병이 그저 퍼질 뿐이라고 했다. “멈추려고는 해봐야죠.” 그는 ㅁ라했다. “하지만 방법을 모르겠어요.”

이제 이 마름병은 전 세계 바나나 농장을 파괴하고 있다. 파키스탄, 필리핀, 인도네시아를 휩쓴 병은 아프리카에서도 나타났다. 아메리카에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2004년부터 지금까지 바나나 연구자 수십명을 인터뷰했지만 이 병이 이곳까지 확산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지난 5년 동안 바나나 연구자들은 서둘러 파나마병을(아울러 곰팡이, 박테리아, 바이러스 감염에서부터 기생충과 투구벌레에 이르는 그 밖의 10여가지 질병도) 이겨낼 수 잇는 품종을 개량하려고 애썼다. 연구자들은 새로운 야생 바나나를 찾아 머나먼 밀림을 샅샅이 뒤졌으며, 다른 바나나와 교배해보기도 하고, 다른 과일이나 야채에서 추출한 유전물질과 결합을 시도하기도 했다. 여러분이 이 책을 읽고 있을 즈음에는 바나나 게놈 해독이 끝났을 것이다.

더 튼튼한 바나나를 얻을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은 유전공학이다. 실험실에서 한 생물의 DNA를 다른 생물과 결합시키는 작업 말이다. 그러나 설사 이 방법이 성공한다 한들, 우리가 먹는 무에서 (진짜) 물고기에 이르는 모든 생물체의 유전자를 삽입해 더 강해진 바나나를 소비자들이 먹고 싶어하지도, 먹는 게 허락되지도 않을 가능성이 높다(현재 대부분의 국가들은 유전자 변형 식품을 금지하고 있다).

위기에 처한 바나나를 신종 마름병에 저항력을 보이는 품종과 교배하려는 노력이 현재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 역시 순탄치 않다. 결과물은 맛도 좋아야 하고, 적당한 시기에 숙성되어야 하며, 대량 재배하기에도 용이해야 한다. 지금으로서는 바나나가 죽을지 살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바나나의 운명에 수백만 명의 목숨이 달려 있다. ‘파퓰러사이언스’에 바나나에 관한 내 첫 기사가 실린 2005년 이후,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사랑하는 이 과일이 처한 위기를 알게 됐다. 그러나 그러한 앎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내가 이책을 쓴 것은 바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알리기 위함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과거에서 현재로, 밀림에서 슈퍼마켓으로, 마을에서 대륙으로, 전 세계 식탁으로 여행할 것이다. 이 책은 바나나 신화로 시작하여, 그런 다음 밀림과 숲에 있던 바나나를 사람들이 처음으로 들판에서 재배하던 고대로 이동한다. 읽다 보면 알겠지만, 많은 곳에서 인류가 농사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바나나 덕분이었다. 우리는 수천 년에 걸쳐 바다를 건너고, 내륙 깊은 곳으로 들어가, 인간이 정착한 거의 모든 곳을 따라다니며 그들을 먹여 살린 바나나의 여정을 좇을 것이다. 우리는 십자군과 스페인 정복자들의 바나나를 따라 근대에 이를 것이다. 이때부터 이 여행은 정치, 문화, 탐욕 그리고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연루된다. 지금 이 시점에 이르면, 위기에 처한 바나나가 등장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 과일을 구하고자 노력하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바나나를 구할 방법이 있음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대담하게 그 해결책을 포용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결국 이 책의 목적은 단 하나, 바나나 구출하기다. 정확히 말하자면 구출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관한 책이다. 이것은 과학책이지만, 세부 플롯과 등장인물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전기이자 모험이기도 하다. 이 책은 치명상을 입은 우리의 벗, 바나나가 현재 처한 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고자 한다. 역사와 고학에, 불변의 과거에, 아직 결정되지 않은 미래에 숨어 있는 해결책을. 이 책이 사후 약방문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주로 열대·아열대 지역에서 발달한 기업식 농업 형태로, 서양의 자본과 기술, 원주민의 노동력이 결합해 커피, 카카오, 사탕수수, 담배 등 단일 작물을 대량 재배한다. 이 책에 나오는 ‘바나나 농장’은 대부분 이러한 플랜테이션이다(옮긴이).

상기 본문은 아래의 책에서 발췌하였으며
본문의 저작권은 아래에 기술한 원문이 수록된 책의 저작권자에게 귀속됩니다.
제목: 바나나
부제: 세계를 바꾼 과일의 운명
지은이: 댄 쾨펠
옮긴이: 김세진
펴낸이: 김미숙
펴낸곳: 이마고
초판 1쇄 발행일: 2010년 9월 24일
ISBN: 978-89-90429-91-9 0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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