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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영혼을 닮은 연습

Written by JoonPapa on . Posted in 놀이, 창의성

악기 연주나 운동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연습과 훈련으 중요성을 알 것이다. 직접 해보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배움의 방법이다.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계획하는 것과 직접 해보는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 로맨스를 꿈꾸는 것과 현실에서 사람을 만나 겪는 일의 차이라고 나 할까.
그러면서도 생각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노력과 인내가 무서워 뒤로 물러서고 만다. 아무리 대단한 잠재력을 지녔다 해도, 그 어떤 위대한 영감이 번득였다 해도 그것이 현실로 옮겨지지 않는 한 창조성이란 없다.

서구에서는 연습이 기술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여겨진다. 이는 현재의 지루함이나 고통을 참아 미래의 보상을 받아낸다는 노동 윤리와 밀접히 관련된다. 하지만 동영의 연습 개념은 이와 다르다. 사람을 창조하는 것, 더 나아가 이미 존재하는 완벽한 인간을 드러내 주는 것이 바로 연습이다. 연습은 무언가 중요한 것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성이다. 선 수행에서는 마루 닦이나 밥 먹기도 연습이라고 한다. 거는 것도 연습이다.
연습과 실제 공연이라는 인위적인 구분을 벗어난다면 우리가 내는 음 하나하나가 모두 기술의 탐구이자 영혼의 표현이 된다. 제아무리 높은 경지에 올랐다 해도 초보자의 활, 초보자의 호흡, 초보자의 몸으로 연주법을 끊임없이 다시 익힐 필요가 있다. 이로써 처음 연주를 배웠을 때의 순수함, 호기심, 열망을 되찾는 것이다. 이 때 연습과 공연은 한 덩어리로 나타난다. 내가 선 수행을 음악과 연결시키게 된 계기도 바로 이 매력적인 개념 때문이었다. 연습이 예술에 꼭 필요하다는 말로 부족하다. 연습이 바로 예술인 것이다.
지루한 연습을 계속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연습은 해야 한다. 지금 하는 연습이 지루하다고 하다면 참고 견디지 마라. 자신에게 맞는 다른 것으로 바꿔라. 음계 연습이 지루하다면 음계의 순서를 바꿔 연습해봐라. 그 다음에는 리듬을 바꿔봐라. 음색을 바꿀수도  있다. 자, 당신은 벌써 즉흥연주를 시작한 셈이다! 결과물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원재료도 있고 스스로 판단할 준비도 된 상태이니 말이다.

생명을 주는 중독
automatic writing(자동 글쓰기), 즉 의식하거나 판단하는 과정 없이 단어를 쏟아내는 방법이 창조적 과정의 시발점이 된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쏟아낸 단어는 나중에 얼마든지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수 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아야 할 필요는 전혀 없다.
자동 글쓰기의 사회적인 형태가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이다. 바보같이 보일지 모른다는 걱정을 접어두고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마음껏 공유하는 것 말이다. 자동 글쓰기의 치료적 형태는 자유연상법인데 무의식적 재료를 자유롭게 끄집어내도록 해준다. 시각예술에서는 손가는 대로 그리는 ‘자동 그리기’ 방법도 쓰인다.
예술가는 아주 미묘한 균형을 잡아주어야 한다. 연습을 ‘실제 상황’과 분리시키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평가하기 시작하면 안심하고 실험하는 가능성이 봉쇄되고 만다. 우리의 연습이라는 것은 두 극단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 성급한 평가를 걱정할 필요 없이 자유롭게 실험정신을 발휘하면서 동시에 완전히 몰입해야 한다.
연습을 통해 창조과정은 추진력을 얻는다. 우연히, 혹은 무의식적으로 얻은 영감이 연습 덕분에 더 커지면서 숨 쉬는 것이다. 영감의 순간을 지속적인 활동과 연결하는 핵심적 통합이 이루어진다. 영감은 이제 순간적으로 왔다가 가 버리는 불꽃이 아니다.
숙달의 경지는 연습에서 나온다. 연습은 놀이로 가득 찬 과도한 실험, 그리고 경탄하는 마음, 그리고 경탄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운동선수는 경기장을 한 바퀴만 더 돌고 싶어한다. 음악가는 한 곡만 더 연주하고 싶어한다. 도예가는 저녁 먹으러 가기 전에 도자기를 하나만 더 만들려고 한다. 그 후에 아마 또 다시 하나만 더 하려 들 것이다. 음악가와 운동선수, 무용가는 근육이 아프고 숨이 가빠도 연습을 계속한다. 이러한 열정은 청교도적 의무감에서 오는 것도, 죄책감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연습은 내적인 보상을 주는 놀이다. 우리 안의 아이가 5분만 더 놀고 싶어하는 것이다.
창조에는 기법, 그리고 기법으로부터의 자유가 모두 필요하다. 이렇게 되려면 기법이 무의식적이 되도록 연습해야 한다. 자전거 타기의 각 단계를 의식하면서 자전거를 타보아라. 당장 넘어지고 말 것이다. 연습을 통해 의식과 무의식이 합쳐지는 화학 작용이 일어난다. 같은 동작을 오래 되풀이 하는 가운데 기술적인 방법론은 ‘잠자면서 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진다. 피아니스트는 생선값을 흥정하면서도 베토벤의 곡을 멋지게 연주할 수 있다. 우리가 철자를 고심할 필요 없이 모국어로 글을 써내려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일정 수준에 다다르고 나면 기법이 모습을 감춘다. 기법이 모습을 감추는 곳도 무의식이고 결국 기법이 드러내는 것도 무의식이다. 기겁은 꿈의 세계, 그리고 신화의 세계에 숨어 있던 무의식적 재료를 눈에 보이도록 , 그리하여 이름을 부르고 찬양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다.

출처 : “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스티븐 나흐마노비치 지음, 에코의 서재)의 2부 ‘과정’ 중 “자유로운 영혼을 닮은 연습’ 중에서